성탄의 초상 The Faces of Holiday 2019-2020
2019년 12월 16일 장석웅에게 쇼크가 왔다.
석웅은 곧장 응급실로 이송됐다. 석웅은 여기가 어디냐 물었다. 나는 병원이라고 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석웅은 여기가 어디냐고 다시 물었다.
그날 이후부터 석웅의 가족에겐 보이지 않는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석웅의 막내아들인 형선은 가족들에게 “예비소집했다고 생각하자"고 말했다.
나는 이 가족에게 일어나고 있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지켜보기로 한다.
응시하는 용기
김예솔비
사진가로 살기를 결심한 한 사람의 내부에서 일어날 격동을 가늠해본다. 우리가 매번 시간에
대한 감상을 뒤로 미루고 우리의 경험들이 과거라는 비가역적인 형상으로 확장되기만을 기다릴 때, 사진가들은 주저 없이 현재의 잠재적인 충만함에 뛰어드려 하는 사람들이다. 망막에
비친 상을 끊임없이 저장하고 소화시키려는 응시. 그 집요함. 그것은 아마도 남들보다 몇 배
더 응축된 시간을 더 살아내야 하는 과정일 것이고, 그래서 어쩌면 생애 전체를 이중으로 겪어내는 피로를 감내해야 하는 자들이 바로 사진가일 것이다. 나는 성재윤이라는 사람을 모르지만, 그가 짐승 같은 용기를 지닌 사람이라는 사실은 알겠다.
성재윤의 첫 번째 사진집인 <성탄의 초상>은 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투병을 맞닥뜨린 그가
예정된 비극을 수용하는 가족들의 반응을 기록해나가는 작업의 인트로에 해당된다. 이제 막
커리어를 시작하는 젊은 작가가 가족의 초상을 찍는다는 사실은 자칫 손쉬운 전략이나 소재주의로 비춰질 수 있는데, 그것은 명백한 오독이라고 말하고 싶다. 실상 가족의 민낯을 포착해야 하는 사진가의 위치는 매우 다층적이고 복잡한 자아의 층위들을 가로지른다. 할아버지가
병원에 실려 간 날 성재윤이 그의 손녀이자 보호자이면서 할머니의 대리인이 되어야 했던 것,
그러면서도 최종적으로는 한발 물러나 모든 풍경들을 태초의 장면처럼 의문스럽게 바라보아야
하는 관찰자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가족을 향해 카메라를 든다는
것은 복수의 자아들을 끌어안은 채 그들의 얼굴을 낯설고 친숙하게(혹은 친숙한 얼굴을 낯설게) 응시해야 하는 수고스러운 분열을 견디는 작업이다.
한편, 그날 이후 다시 모인 성탄절에 가족들은 할아버지에 대한 사항을 함구한 채 파티를 즐긴다. 이에 대해 성재윤은 기분이 이상했다며 ‘나만 그날을 지나온 사람처럼’ 느껴졌다고 쓴다. 시간에 전면적으로 반응하며 이완된 현재를 살아야 하는 사진가가 가족 구성원들과 이러
한 ‘시차’를 겪는 건 숙명과도 같은 일이다. 성재윤은 어른들이 외면하고 흘려보내려는 시간을
기어코 끈덕지게 붙잡아 그들의 침묵을 향해 질문을 던진다. 시간의 잔재 속에서, 홀로 됨의
여정을 실천하며.
역설적이게도 작가가 가족들의 침묵을 문제시하는 방식은 ‘시끄러운’ 사진들을 통해서이다. 파티가 벌어지고 있는, 할머니의 집으로 추정되는 실내에서 카메라 플래시를 이용해 밝게 촬영
된 사진들은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투박함을 자제하려는 기색 없이 온전히 발산한다. 발광하는 카메라 앞에서, 얼굴과 사물은 스스로의 가장 선연한 실체를 드러낸다. 피사체뿐만 아니라
후경에 보이는 생활의 사적인 흔적들까지 선명하게 읽어낼 수 있을 정도다. 그야말로 시각적
정보들의 범람인 셈이다. 이런 이미지들은 보는 것만으로 의식상의 소음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또한 한정된 장소와 시간의 축 위에서 압축적으로 전개되는 사진들의 흐름은 초 단편 영화의 운동성을 상기시키는데, 이로 인해 사진을 보는 내내 현장의 왁자지껄함이 영화의 내재
음으로 재생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사진들 사이에 출현하는 문장들은 인접한 이미지와 충돌하며 소격효과를 발생시키는 보이스오버(외재음)로 기능한다. 수술의 위험
성을 경고하는 의사의 말로 추정되는 이 차가운 문장들은 잔뜩 흥이 오른 가족들의 이미지와
나란히 배치되어 더욱 잔혹해진다. 심지어는 띄어쓰기조차 없이 적혀서, 소통을 매개하는 말
이기보다 그저 하나의 덩어리진 소음처럼 다가온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 문장들이
한데 모여 거대한 군집을 이루면, 상상 속 소음의 데시벨은 최대로 증폭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이토록 요란한 침묵이라니.
정작 필요한 말은 삼켜버리고 주변부의 소음들만 극대화될 때, 강조되는 것은 필요한 말의
‘부재’일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아이러니라고 부르는 효과다. 작가는 가족사의 비극이 금기인
것처럼 음소거되는 광경에 의문을 품으며 ‘요란한 침묵’의 이미지들을 통해 비극의 존재감을
환기하고 쓸쓸한 웃음을 안겨주는 블랙코미디를 구성한 것이다. 물론 <성탄의 초상> 안에 익살과 과장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덧붙여야겠다. 먹고 남은 음식물의 잔해, 웃음기 없
는 무연한 얼굴들, 허공을 응시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사진 속에는 정신없이 웃다가도 어떤 불안이나 걱정 때문에 굳어지는 순간들이 잔존해있다. 낙담의 희미한 빛이 섬칫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는 감각. 과장된 웃음과 말들로 애써 가리려 했던 비애감이 조용하게 번뜩이는 장면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테다.
비약처럼 들릴 가능성을 무릅쓰고, 한 가지 가설을 세워보려 한다. 이 장면들은 피사체가 침
체된 표정을 짓는 순간을 우연히 촬영한 것이라기보다는, 가족들의 내부에 자리한 잠재적 심연의 형상을 포착한 것 같다고.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사진가는 겹쳐진 시간을 살아내는 자아이다. 사진가의 시간은 선형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지금’에 끊임없이 침투하는 기억과 징후처럼 다가오는 미래의 전조들, 트라우마와 날 선 직감들이 눅진하게 들러붙은 현재 속에 사는
것이야말로 사진가의 역능이자 운명이다. 따라서 기쁜 우리 성탄절 날의 사진들 속에 누수된
‘심연’은 할아버지가 병원에 실려 갔던 날의 참담했던 기억이 투영된 것일 수도 있고, 차후에
도래할 슬픔을 이 자리에 데려온 것일 수도 있다. 즉, <성탄의 초상>으로부터 출발하는 성재윤의 행보는 가족들의 초상을 과거와 미래가 횡단할 수 있는 포털로 개방해두고 시간과 기억에 대한 작가 자신의 소회를 기입해나가는 과정일 것이다. 가족을 근접해서 응시한다는 것은
‘나’의 연원을 파고들어 가는 일이기도 하니까.
이제 예정된 행사를 향한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었고, 오늘 이후로 무한한 미끄러짐만이 남아
있는 것 같다. 복조리에 성탄절 장식이 달려있는 모양새는 그저 우스꽝스럽기만 하다. 헛웃음이 그치질 않는다. 시한폭탄 같은 혈관을 두른 몸으로도 생의 환희에 가득 찬 표정을 짓는 노인. 어른들의 서둘러 불러온 취기와 과장하는 이목구비. 이 모든 광경들은 부조리의 현현 그
자체가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무얼까. 씁쓸하게 조소하면서도 이 모든 시간을 돌파하기로 결
심한 사진가의 마음가짐에는 이상한 감동이 있다. 그것은 자신이 속한 세계의 조건들을 변화
시키려는 거대한 동작이기 때문에. 성재윤은 가만히 서서 시간의 명료한 상이 떠오르기만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는 시간의 디테일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이다. 지금 그는 가능세계 속으로
몸을 던지려 한다. 짐승의 심장을 가지고. 두려움에 결코 압도되지 않을 얼굴을 하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