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uy Days   2022-Ongoing



#0

몬스터비 압박 브라가 풀리면 가슴 두 짝이 살겠다고 덜렁 튀어나온다. 열두 시가 지나면 다시 누더기 옷으로 돌아가는 신데렐라처럼 몬스터비의 마법이 끝나면 나는 남자도 트랜스젠더도 아닌 그냥 스물네 살 머리 짧은 여자애가 되어있다. 겨우 이 천 떼기 하나에 매달린다. 형제의 민증을 빌리는 것 끈나시 대신 민소매를 입는 것 허벅지가 전부 드러나기보단 반만 보이는 바지를 고르는 것 오렌지 색 머리 말고 검정 머리를 유지하는 것.


나를 확인하는 횟수가 늘었다. 오늘은 얼마나 더 남자 같은지, 남자 같지 않은지. 그 무엇도 아닌지. 셀카를 찍는다. 턱을 살짝 내려보고 들어본다. 눈을 내리깔았다가 45도로 눈알을 들어 올린다. 왼쪽보다 오른쪽 얼굴이 더 중성적으로 나온다. 팔꿈치로 가슴을 짓누르다가 어깨를 넓혀 본다. 어플에 올릴 사진을 찍는다. 가슴은 안 보이게 침대에 엎드린다. 어깨와 등, 엉덩이가 시작되는 부분까지만 보이게 올린다. 프로필을 저장하고 기다린다. 알림이 울린다. 숫자가 쌓인다.



#1

눈앞에 연인으로 보이는 두 남자가 서 있다. 마주 보고 있던 둘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한다. 너를 같은 남자로서 사랑한다고. 눈을 뜨자 입꼬리가 둥글게 휘어져 있었다. 그 꿈은 재윤의 태몽이 된다.



#2

가장 혐오했던 남자는 나의 외할아버지, 석웅이였다. 석웅을 보며 남성성이란 폭력적인 것, 시끄러운, 무례한, 권위적인 이미지로 이어졌다. 그러나 살면서 가장 편안하고 애정했던 인물들 역시 ‘남성’이었다. 석웅에 대한 감정이 모호해지듯 다른 남자들을 향한 마음이 흐려졌다.



#3

걸그룹 춤을 추는 남자들, 남자와 키스하는 남자, 부드럽게 손짓하는 남자, 수줍게 웃는 남자, 조곤조곤히 말하는 남자, 소리 지르지 않는 남자, 근육이 온몸을 뒤덮지 않은 남자, 조금은 부서질 거 같은 몸을 가진 남자, 어리숙한 남자, 군대 얘기가 시작되면 자리를 빠져나오고 싶은 남자, 목욕탕과 업소에 가고 싶지 않은 남자, 주민번호 앞자리가 2나 3으로 시작하는 남자, 생리를 해 본 적 있는 남자들…



#4

소년의 몸을 가지고 싶다. 판판한 가슴, 선명한 턱선, 뼈와 근육의 모양새, 낮은 목소리…
탐스럽다. 사진을 매만진다. 핥는다. 할퀸다. 그 몸을 가지고 싶다. 입고 싶다.



#5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는 거 말고, 이곳과 저곳이 만나는 점에 서있고  싶다. 하지만 클럽에 가고 병원을 가고 알바를 하려면 둘 중 한 곳으로 가야 한다. 그때 가고 싶은 곳은 F보단 M의 자리. 요즘은 내 뒤로 이름이 따라오는 게 아니라 이름이 내 앞에 있고, 그 이름을 쫓아가려 한다고 느낀다.

몸선이 드러나지 않게 입어. 타이트하면 안 돼. 펑퍼짐하게. 밝은 옷보단 어두운 옷, 치마는 절대 안 돼. 바인더를 입든 테이핑을 하든 그 덜렁이는 가슴은 잘 붙들고 와. 니가 남자가 되고 싶다면 노력을 보여 봐.


그 이름을 가지기 위해 해야 하는 일과 조건에 나를 끼워 맞추고 튕겨져나오길 반복한다.


*

이태원은 나에게 해방 공간이다. 처음 간 건(물론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또 다른 세계가 있는 이태원에 갔기 때문에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어플로 만난 친구가 게이 클럽에 데려가 주면서부터였다. 게이들로 바글바글한 클럽에 들어갔을 때 이곳이 지금까지 바라왔던 공간이라고 단숨에 알았다. 걸그룹 노래에 춤을 추는 남자들 그 옆에 남자와 남자가 부둥켜안고 키스하는 그 사이에 내가 있다는 게 그랬다. 이태원에는 요란하고 기괴하고 미치광이들이 많아서 나도 같이 요란하고 기괴하고 미쳐버릴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그 사이에서 내 요란함은 눈에 띄지도 않는 것이 좋았다. 그곳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 같다.

술에 잔뜩 취해서 다른 클럽으로, 또 다른 클럽으로 갈 때 등산이라고 투덜대면서 이태원의 언덕을 오르내린 것, 클럽 앞에 철푸덕 앉아서 비싸고 양이 적은 케밥을 욱여넣던 것, 팔에 진한 문신을 새긴 사장님이 날라주는 뚝배기 불고기로 해장하던 것, 해가 뜰 때 이태원역으로 좀비처럼 걸어간 것, 길가에 널려있는 사람들을 보면 한심한데 그게 또 우리 같아서 웃은 것, 담배 냄새, 술 냄새, 클럽 냄새에 절여진 몸으로 6호선을 타고 집에 가던 것.

우린 금요일만 되면 이태원에 가자고 했다. 이제 금요일이 되어도 아무도 말을 안 꺼낸다. 이태원에 가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 어제는 아침에 이태원에 갔다. 밤마다 우리가 갔던 곳들을 빙빙 돌았다.